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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유일한, 상공인으로 식민지 조선에 뛰어들다

by 晴景 조상규 2017. 11.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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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진찬은 미국 네브라스카주에 설립된 소년병학교(少年兵學校)에서 군사교육을 받고, 이후 학도를 양성하였다.


 1908년 5월 박용만, 박처후, 임동식, 정한경 등이 의론하여 청년동지의 군사교육을 위한 학교 건립이 처음 제기된 후, 12월 학생들의 기숙할 곳과 병학교의 기반을 닦기 위해 네브라스카주에 커니농장을 설립하였는데, 이때 조진찬은 농장의 운영과 관리를 맡으며 소년교육에 종사하였다. 그리하여 1909년 6월 비로소 소년병학교의 군기를 커니농장에 꽂고 학도 13명을 모집할 수 있었다. 1910년 박용만의 제의로 학교를 네브라스카 헤스팅스로 옮겼다. 조진찬은 커니농장에서 이곳으로 옮겨와 유은상과 함께 농장 운영 및 소년병 모집에 노력하였다. 1914년 2월경 학교 운영의 재정적 어려움에 처하자 찬조금 기부를 권하는 '소년병 유지단 취지서'를 이상진과 함께 발기하기도 하는 등 평생을 소년병학교와 흥망을 함께 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0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군복차림의 늙은 훈련생 조진찬





 1919년 4월 16일 필라델피아의 '한인자유대회' 행진. 맨 오른쪽에서 그때 나이 24세의 유일한이 태극기를 들고 있다.




소년병학교 교관과 생도들(1910년). 앞줄 왼쪽에서 3번째가 교장 박용만, 둘쩨줄 북 뒤의 소년이 조오홍, 맨뒷줄 왼쪽에서 5번째가 유일한




  한 여름 불볕 속에서 사격훈련하는 생도들. 왼쪽에서 3번째가 당시 46세로 최고령자였던 조진찬(1910년)






조진찬은 하와이에서 본토로 건너 와 커니 시 인근에서 농장을 임대경영하고 있었다.

박용만의 구상을 듣자 그는 두 말 없이 농장을 훈련장으로 내놓았다.

 

그의 농장에 소년병학교의 기를 세우고 군사훈련을 시작한 건 19096. 화씨 100도를 넘게 태양이 지글거리는 한 여름이었다.

13명의 생도들이 나팔 소리에 맞춰 아침에는 농장일을 하고 오후에는 군사훈련을 받는 일과를 시작했다.

조진찬은 농장을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자식보다 어린 학생들과 함께 군사훈련도 받았다.

 네브래스카 평원에 쏟아지는 한 여름 불볕은 가마솥 같았다.

금세 군복이 물걸레처럼 젖는데도 조진찬은 개의치 않았다.

 

"나이 비록 늙었으나 왜놈을 향해 총을 쏘기는 늙은이의 총알도 젊은이의 총알만치 뜨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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